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8. 8. 15:27

충남 아산에 평택과 경계지점에 둔포면이 있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가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로 막혀 더 이상 배가 드나들지는 않지만, 그 옛날 1906년 조선성공회 제2대주교였던 단아덕(Arther Beresford Turner, 1862-1910, YMCA 창립이사 및 3대회장, 축구보급)주교의 기호지방 첫 선교개척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골교회도 기와로 된 한옥성당으로 되어 있었으나, 2003년 도시계획으로 도로가 나면서 안타깝게도 철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시골교회에서 일제시대에 벌어졌던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공회둔포교회 전경, 1973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고, 서양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성공회 역시 외국인 주교와 사제들이 모두 영국으로 귀국하고, 선교지원이 모두 끊긴 상태에서 지역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성공회는 자주 영국스파이로 몰리며 시시때때로 집뒤짐을 당하고, 요시찰대상이 되었으니 교인들도 조금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들은 아무런 경제적 방편이 없이 성당을 지키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습니다. 당시 둔포교회에는 강애단 신부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처지가 어려웠던지 이웃에 살던 무당이 굿판에서 시루떡을 가져다가 몰래 성당 개나리 울타리에 숨겨두고 아이들에게만 살짝 귀뜸을 해주곤 하였을 정도입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그런 형편에서도 성당에서 동네 청년들을 교사로 모집하여 야학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탁구 등의 운동경기를 하는 등 농촌계몽 활동을 활발하여 벌였습니다. 일제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고, 야학과 운동경기장에 찾아와 방해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협박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필요하면 아무 때나 총동원령을 내리고 청년들을 훈련시켰다가 징발해가곤 하였는데, 둔포교회에도 수난이 찾아왔습니다. 둔포성당을 훈련장소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당을 일본을 전쟁 훈련장소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주교님 허락이 있어야 성당을 빌려줄 수 있노라며 차일피일 피해온지 2개월을 버티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순사부장이 찾아왔습니다. “저쪽 감리교회는 벌써 교회를 내놨는데 강 선생은 왜 핑계만 대고 피해다니나?” 하더니 여러 명의 장정들이 달려들어 성당 기물을 밖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이젠 정말 마지막 카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성당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순사부장에게 주인 허락도 없이 성당기물에 손을 대는 것은 엄연한 불법임을 지적하고, 서울에 가서 주교님을 만나 성당 대여 문제를 여쭤볼 터이니 여행증을 끊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순사부장은 여행증을 발급해 줄터이니 내일 아침 주재소로 오라는 말을 남긴채 작업을 중단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앞이 캄캄하였다. 이대로 성전을 내주어야 할 것인가? 걱정이 심해서 그랬는지 오후에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였다. 큰아이 하나만 빼고 아내와 어린 것까지 온가족인 모두 열병을 앓고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이 되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전이 지나도 주재소에 나가지 않자 피신을 했구나 싶었는지 순사부장이 찾아왔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니 온 가족이 방안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강애단 신부 회고록" 中 >

  둔포 지방을 휩쓸던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목회자 가족에게 덮친 것입니다. 순사부장은 기겁을 하여 성당을 훈련소로 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사택을 비롯하여 성당 마당까지도 새끼줄로 금줄을 둘러놓아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로 신부님과 그의 가족은 한 달간을 앓고 가족 모두 일어났고, 성당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해방 직후에 지역사람들의 추천으로 주민자치기구인 자치회의 회장을 맡아, 일제로부터 수탈당한 재산을 환수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신부님은 해방전에 자신과 사람들을 핍박했던 일본인들을 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치회의에 끌려온 일본인들을 꾸짖고는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본인 집 앞에 치안대원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성직자이기 이전에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려 노력한 지역운동가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가 선교초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설립운영하던 사립학교는 총 25개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교육기관은 예산의 신명유치원, 서울항동의 성베드로학교,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등이며, 대부분 일제의 방해로 인해 문을 닫거나, 공립학교로 전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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