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9. 9. 16:58

제 16 회 원주시 사회복지대축제에서 나눔의집 실무자 리코더팀 "어울림"이 공연을 하였습니다. 어울림은 실무자들이 시간을 쪼개어 리코더 연습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아 아름다운 나눔 공동체 하모니를 만들기를 바랍니다. 리코더 배움 시간은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읽고, 정성을 모으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벌써 3년간 리코더 모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리코더 모임을 통해서 자칫 사회복지운동을 통해 소진되기 쉬운 우리의 첫 열정을 되살리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조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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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단 내지르고 보는 은자씨 2011.09.13 21:09  Addr  Edit/Del  Reply

    제가요..베이스 소리 들으려고 자석에 끌리듯 기울어져가고 있어요. ㅎㅎㅎ..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9. 8. 14:39

성공회이야기3 - 한국전쟁과 성공회

 

한국전쟁은 성공회에 많은 순교자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희생이 많았는데,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있을 때에도 목회자로서 교회와 신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공회 4대교구장이었던 구세실(A.C.Cooper, 1982-1964) 주교님은 한국전쟁을 목전에 두고도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전쟁과 관계없이 자신의 사목계획에 따라 움직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12일에 새로 건축한 강화 내리교회의 ‘성 패트릭 성당’을 축성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일에는 여주교회 순방을 하고 있었고, 이어서 예정대로 천리교회와 수원교회를 방문한 후 피난길을 거슬러 6월26일 밤에 서울로 떠나 6월27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때였습니다.


<대한성공회 순교자비, 서울주교좌성당>

이후 구세실 주교님과 윤달용 신부님, 이부비 수녀원장님, 마리아 클라라 수녀님, 홍갈로(헌트) 신부님, 이도암 신학원장 신부님, 조용호 신부님 등은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대부분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 때까지 북한지역의 교회를 지키던 이원창 신부님, 임문환 신부님은 지금까지 그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구세실 주교님과 홍갈로 신부님, 마리아 클라라 수녀님은 수감이후, 외국인으로 간첩혐의를 받고 평양을 거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홍 신부님과 클라라 수녀님은 기아와 추위에 지쳐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평양-만포-중강진-고사진 등지의 포로수요소를 전전하며 ‘죽음의 행렬’을 이겨내고, 포로송환 결정에 따라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경우, 모스크바를 거쳐 마침내 1953년 4월22일 런던에 무사하게 귀환하였습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죽음의 행렬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헌트(홍갈로) 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는 나와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무서운 100마일 행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행군을 하면서 죄의 고백기도를 했고 죄를 사하는 기도를 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면서 가진 귀한 예식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 위에서 얼어붙은 흙을 파고 장례미사를 지낼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다시 한국에 귀환하였으며, 1955년 73세의 나이로 사임할 때까지 그의 전 생애를 한국에 바친 분입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1882년 출생하여,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25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아 그 이듬해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됩니다. 1931년 49세로 주교서품을 받아 대한성공회 4대교구장이 되었으며, 1941년 일제에 의해 영국으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 직후에 선교사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피랍되었다가 극적으로 귀환하였으니 가히 불사조와 같은 성자라고 불리울만 하였습니다.


<병천교회 교우들과 함께 한 구세실 주교님, 1954년>

전쟁기간 동안에도 교회의 선교활동은 계속되어 1951년 12월에 안중에 고아원을 개원하여 115명의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산에서는 바로우(박바우로) 선교사가 성니콜라구호소(St. Nicholas Shelter)를 설치하여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참고로, 성공회에도 수녀원이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재 한국성공회에는 서울 성가수도회, 성공회프란시스수도회, 미원 성프란시스수녀회, 성분도수녀회, 구미 프란시스수녀회 등이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초대 코프주교님은 영국의 ‘성베드로수녀회’에 수녀의 파송을 요청하여, 선교초기부터 모두 18명의 수녀님들이 파송되어 헌신하였습니다. 여성선교를 위하여 선교관을 열고 여전도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껴, 한국인 수녀회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1925년 드디어 한국인 첫 지원자 이비비 수녀가 입회하여 성십자가수도회(성가수도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마리아 클라라 수녀(sr Mary Clare Whity)님은 성가수도회의 창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초대 신모로 취임하였습니다. 현재 성가수도회는 서울주교좌 성당 옆에 본관을 두고 있으며, 성안나의집과 성보나의집 등 사회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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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8. 8. 15:27

충남 아산에 평택과 경계지점에 둔포면이 있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가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로 막혀 더 이상 배가 드나들지는 않지만, 그 옛날 1906년 조선성공회 제2대주교였던 단아덕(Arther Beresford Turner, 1862-1910, YMCA 창립이사 및 3대회장, 축구보급)주교의 기호지방 첫 선교개척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골교회도 기와로 된 한옥성당으로 되어 있었으나, 2003년 도시계획으로 도로가 나면서 안타깝게도 철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시골교회에서 일제시대에 벌어졌던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공회둔포교회 전경, 1973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고, 서양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성공회 역시 외국인 주교와 사제들이 모두 영국으로 귀국하고, 선교지원이 모두 끊긴 상태에서 지역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성공회는 자주 영국스파이로 몰리며 시시때때로 집뒤짐을 당하고, 요시찰대상이 되었으니 교인들도 조금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들은 아무런 경제적 방편이 없이 성당을 지키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습니다. 당시 둔포교회에는 강애단 신부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처지가 어려웠던지 이웃에 살던 무당이 굿판에서 시루떡을 가져다가 몰래 성당 개나리 울타리에 숨겨두고 아이들에게만 살짝 귀뜸을 해주곤 하였을 정도입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그런 형편에서도 성당에서 동네 청년들을 교사로 모집하여 야학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탁구 등의 운동경기를 하는 등 농촌계몽 활동을 활발하여 벌였습니다. 일제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고, 야학과 운동경기장에 찾아와 방해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협박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필요하면 아무 때나 총동원령을 내리고 청년들을 훈련시켰다가 징발해가곤 하였는데, 둔포교회에도 수난이 찾아왔습니다. 둔포성당을 훈련장소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당을 일본을 전쟁 훈련장소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주교님 허락이 있어야 성당을 빌려줄 수 있노라며 차일피일 피해온지 2개월을 버티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순사부장이 찾아왔습니다. “저쪽 감리교회는 벌써 교회를 내놨는데 강 선생은 왜 핑계만 대고 피해다니나?” 하더니 여러 명의 장정들이 달려들어 성당 기물을 밖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이젠 정말 마지막 카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성당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순사부장에게 주인 허락도 없이 성당기물에 손을 대는 것은 엄연한 불법임을 지적하고, 서울에 가서 주교님을 만나 성당 대여 문제를 여쭤볼 터이니 여행증을 끊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순사부장은 여행증을 발급해 줄터이니 내일 아침 주재소로 오라는 말을 남긴채 작업을 중단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앞이 캄캄하였다. 이대로 성전을 내주어야 할 것인가? 걱정이 심해서 그랬는지 오후에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였다. 큰아이 하나만 빼고 아내와 어린 것까지 온가족인 모두 열병을 앓고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이 되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전이 지나도 주재소에 나가지 않자 피신을 했구나 싶었는지 순사부장이 찾아왔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니 온 가족이 방안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강애단 신부 회고록" 中 >

  둔포 지방을 휩쓸던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목회자 가족에게 덮친 것입니다. 순사부장은 기겁을 하여 성당을 훈련소로 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사택을 비롯하여 성당 마당까지도 새끼줄로 금줄을 둘러놓아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로 신부님과 그의 가족은 한 달간을 앓고 가족 모두 일어났고, 성당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애단 신부님은 해방 직후에 지역사람들의 추천으로 주민자치기구인 자치회의 회장을 맡아, 일제로부터 수탈당한 재산을 환수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신부님은 해방전에 자신과 사람들을 핍박했던 일본인들을 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치회의에 끌려온 일본인들을 꾸짖고는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본인 집 앞에 치안대원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성직자이기 이전에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려 노력한 지역운동가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가 선교초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설립운영하던 사립학교는 총 25개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교육기관은 예산의 신명유치원, 서울항동의 성베드로학교,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등이며, 대부분 일제의 방해로 인해 문을 닫거나, 공립학교로 전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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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8. 5. 16:29


가끔 ‘성공회’ 교단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공회는 기독교의 작은 교단이지만, 사회사업은 대형교단에 버금갈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교단 이름에 ‘기독교나 예수교’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 이 또한 낯선 일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지면을 이용해 성공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몇 차례 올려볼까 합니다.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 강화읍성당

대한성공회는 영국성공회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어, 초대주교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님이 1890년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성공회(聖公會)’라는 명칭은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의 한문 표기로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교회의 명칭입니다. 처음 선교가 시작될 때 교단 명칭은 ‘종고성교회(宗古聖敎會,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거룩한 공교회)’였으나, 한국보다 먼저 선교된 한자문화권 중국과 일본에서 ‘성공회’라는 명칭을 사용했기에 한국에서도 1910년 ‘성공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교단 이름에 특정 교파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은 이유는 그 나라와 민족의 얼이 담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성공회 정신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때문에 선교초기 영어식 명칭은 ‘The Church of Corea’였습니다. 또한, 일제시대 이전에 지어진 성당은 대부분 한국식 기와집의 형태에 바실리카 양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강화읍성당(1910년 건축)’의 경우, 불교사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성공회의 토착의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종교개혁시기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교단입니다. 정치적으로 부당하게 내정간섭을 벌이는 로마교회로부터 독립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적인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서 왕과 시민사회가 함께 종교개혁을 벌여 영국국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영국교회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친교관계를 유지하는 세계 교회들을 성공회(聖公會, Anglican Communion, Episcopal Church)라고 부릅니다.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지만, 삼성직(주교, 사제, 부제)과 전례 등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신앙의 기준을 ‘성서, 이성,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성적이고, 관용적이며, 성사적 교회입니다. 세계에 8천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한국에는 120개의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대한성공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기독교대한감리회, 구세군 등과 함께 ‘한국교회협의회(NCC)’의 회원교단입니다.

일제시기에는 민중들과 함께 모든 종교들이 억압과 수탈을 받았습니다. 성공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사립학교들이 문을 닫고, 성당마저 군사훈련장소로 공출 당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특히, 충남 병천에서 있었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성공회가 깊게 관여하면서, 일제에 의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성공회병천교회가 운영하던 진명학교의 교사 김구응 선생의 지휘하에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김구응 선생은 현장에서 총탄을 맞고 즉사하였으며, 이를 본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박병무(어거스틴) 전도사, 교인이며 지역 유지였던 강대형(아브라함), 신자회장이었던 정관서(요셉) 등은 물론 병천교회 청년회 회원들도 만세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날 총상을 입어 부상을 당했으며, 투옥되고, 심한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도 이 날 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옥사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우내 만세독립운동의 제일의 지도자요 맨 선봉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다가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죽은 김구응 선생의 이름은 잊혀진 채 병천지역 지식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몇 군데 기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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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단 내지르고 보는 은자씨 2011.08.26 14:43  Addr  Edit/Del  Reply

    box안에 있는 글은 별도로 소식지에 항상 실리면 어떨까요?
    간혹 궁금해 하는 분들을 만나뵙게 되는데 이 글을 보시면 설명이 정말 잘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회적인게 아쉽군요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7. 21. 11:17

아동청소년부와 고용지원부가 둥지 프로그램에 대해서 상의하는 것을 귀동냥으로 엿들으면서
책 "어린이공화국 벤포스타"가 떠올랐습니다.
일단, 아래의 영상을 보세요.



어떻습니까? 멋지죠?

책으로 보면 더 멋지답니다.

하지만, 현재 더 이상 벤포스타는 없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재정문제와 성적인문제 등의 복잡한 문제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59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아주 부드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멋진 상상력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아동청소년부에서는 더 그럴 것이고, 그 중에서도 꺼병이길찾기 둥지에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원주의 자원, "협동조합"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체로 서로 원조하면서 살아가자는 상상력.
그 상상력이 우리 아이들에게 어릴 때 부터 믿음과 신념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지금 어른들이 만들어논 세상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꺼병이들이 그렇게 길을 잡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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