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건조한 국신부'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1.03.03 비폭력 저항과 적극적 평화운동 (3)
  2. 2011.02.18 책임감 (1)
  3. 2011.02.16 증오와 편협한 신앙
  4. 2011.02.15 전국성직자신학연수 강연 요약 및 간단후기 (1)
  5. 2011.01.27 에바다 학교 기억들... (4)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3. 3. 16:51

삼일절이 지났습니다. 일제에 맞서서 한반도의 민중이 일으킨 비폭력 저항운동이 삼일만세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폭력 운동을 성서의 산상수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비폭력 저항의 방식이라 이해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기독교인들은 칼을 들고 저항하기 보다는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이 순교의 씨앗이 기독교를 반석위에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의 진리가 불의한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고 참 평화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혹시 알게 모르게 교회가 국가권력과 야합하여 권력의 편을 들어줌으로 해서 순교가 멈추었던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불의한 국가권력 등에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로 설교되어 왔습니다.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친권력주의적 성향을 꼬집으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폭로하였습니다.

한편, 신학자들 중에서 이 말씀을 "무저항"을 강제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비폭력적인 방식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규항'씨는 그의 책 "예수전"에서 오른뺨을 치는 것은 오른손의 등으로 때린 것, 즉 상대방에 대한 심한 모욕을 의미하며,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상대에게 나도 인격체이니 제대로 때리라는 조용한 외침이라고 해석하였다. '월터 윙크'는 그의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벗어주고, 5리를 더 걸어주는 행동은 상대방에게 당혹감을 주는 적극적 비폭력의 방식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겉옷까지 벗어주고 나체로 자신을 드러내어 상대방이 '제발 겉옷은 입어주시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7-8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탄압에 맞서서 나체로 시위를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억압자'에게 저항하는 '비폭력 피해자'의 구도는 변함이 없다. 다만 피해자의 행위가 무저항에서 비폭력저항으로 바뀌어 설명되어질 뿐이다.

국내 신학자 중에서 성공회대학교 최영실 교수는 이러한 구도를 완전히 역전시킨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행해질 때 폭력을 당하는 사람도 상대를 향해 원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폭력을 하는 사람도 폭력의 정당성을 상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보복금지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본문(마태 5:38-48)은 "형제에게 화를 내고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1~26)"는 본문과의 연관성을 속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형제들을 원수로 규정하여 보복하려는 것을 멈추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형제를 원수로 지목하고(폭력의 정당성 획득), 보복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멈추라는 말씀이라는 해석은 해방적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제자그룹과 일반민중들, 그리고 바리사이파와 군인들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 행해졌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이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드러내신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오른뺨을 치는 사람도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가 아니라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해자는 상대가 '원수, 맞아도 싼 놈, 죽일 놈'으로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아무런 도덕적 거리낌 없이 일상적인 폭력을 행하는 자였다. 어느 날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리던 상대가 저항의 몸짓을 취하였다. '너도 한 번 맞아봐라. 왜 때리는 거냐.'하며 오른뺨을 때린 것이다. 가해자는 그 순간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서 당연시 해왔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도끼는 도끼가 부러졌을 때 도끼로서의 존재가 더 확실해진다. 피해자이기만 했던 존재가 죽을 각오로 저항할 때, 비로소 그 존재에 대한 개념규정이 새롭게 리셋되는 시점이다. 이런 저항을 '적극적 평화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의 싸다귀'라고 불러도 좋다. 폭력 앞에서 '회피, 순응, 역폭력'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제4의 대안적이며 창조적인 길(왼뺨을 돌리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고민해야 할 사람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날 해방의 싸다귀를 얻어맞은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삼일운동도 불의한 일제에 맞선 적극적인 평화운동이며,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쓰러뜨린 것 또한 적극적인 평화운동이다. 비폭력인가 아닌가가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 가해자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평화운동의 방식과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국신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자력발전소 그 불편한 진실...  (1) 2011.03.22
기도  (1) 2011.03.17
비폭력 저항과 적극적 평화운동  (3) 2011.03.03
책임감  (1) 2011.02.18
증오와 편협한 신앙  (0) 2011.02.16
전국성직자신학연수 강연 요약 및 간단후기  (1) 2011.02.15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내는 은자 2011.03.03 22:50  Addr  Edit/Del  Reply

    '해방의 싸다귀' 정말 놀라웁네요... 정말요... 진정어림과 냉정함이 있는 사랑과 바로 연결이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2. 무미건조 2011.03.10 09:31  Addr  Edit/Del  Reply

    건강추구? 저런...

  3.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03.11 11:10 신고  Addr  Edit/Del  Reply

    댓글을 삭제하였습니다..ㅋㅋㅋ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2. 18. 11:25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면, 이 인류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나 그에 대한 보복 행동 등이 아니라, 온순하고 책임감을 결여한 현대인들이 각종 야비한 계율에 비열하게 복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역사, 또 앞으로 일어날 더 전율할만한 사건의 원인은, 반항하고 길들이기 힘든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데 있다.

책 "비폭력 대화"에 인용된 George Bernanos(프랑스 작가)의 글.


'무미건조한 국신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1) 2011.03.17
비폭력 저항과 적극적 평화운동  (3) 2011.03.03
책임감  (1) 2011.02.18
증오와 편협한 신앙  (0) 2011.02.16
전국성직자신학연수 강연 요약 및 간단후기  (1) 2011.02.15
에바다 학교 기억들...  (4) 2011.01.2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내는 은자 2011.02.19 09:44  Addr  Edit/Del  Reply

    동의. 그리고 또 한종류도 있다는걸 알게되었죠. 공허감, 혹은 허탈함으로 인해 '될대로 되라지. 어차피 때되면 죽는데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하는 거죠. 비겁함보다는 게으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인은 사랑이 없음이잖아요.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2. 16. 11:40

신앙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나역시 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사랑이 전염되면, 결국 하느님의 뜻이 온 세상에 퍼지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렬한 신앙인에게서 열렬한 사랑이 나오기보다는 증오와 편협함이 넘쳐흐르는 모습을 볼 때 당혹감을 느낍니다.

며칠 전 몇분의 목사님과 장로님 몇분이 조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확성기로 "부처가 비를 줘? 비가 와야 사는거야. 비가 와야 농사 짓고 밥 먹고 사는 거야. 그것도 모르면서 밥 먹으면 돼?"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그 곳에서 그렇게 외치다가 성난 불자들에 의해서 폭행당해 순교하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당장 불을 내려 대웅전과 우상숭배자들을 불사르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그 영상을 보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분노를 함께하기를 바랐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분들은 확신범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신앙은 증오와 편협함에 기반해 있습니다. 그분들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증오하고 미워하는 하느님입니다. 구원의 하느님이 아니라 심판의 하느님입니다.

미국 성공회를 변화시킨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장애인이자 흑인이었던 신자 '제임스 버드 주니어'가 인종차별주의자의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 다른 하나는 동성애자였던 청년신자 '매튜 쉐퍼드'가 동성애차별주의자들의 폭행과 방치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전체 교회를 큰 슬픔에 빠트렸습니다. 그리고 도데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를 자문하게 했습니다. 쉐퍼드는 동성애 성향을 숨기지 않았지만, 교회에서 매주일 복사로 봉사를 할 정도로 누구보다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적지향을 공개했다는 것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살해되었습니다. 에피스코팔 라이프(the Episcopal Life)지는 사설에서 이제는 인종차별주의라는 단순한 말도 사용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대신에 ‘증오’와 ‘편협한 신앙’이야 말로 온갖 형태의 차별주의를 낳는 근원으로 규정하고, 이를 우리의 신앙적 운동과 행동으로 척결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주낙현 신부님 블로그 참고 http://viamedia.or.kr/1998/11/15/60 )

하느님은 심판과 증오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과 증오의 대상은 연약한자들이나 소수자들이 아닙니다.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려 했던 파라오와 로마황제들에 대한 분노와 심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과 행운을 받게 해 주겠다고 꽤어 착취하고 그른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든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분노와 심판입니다. 정의와 평등을 무시한 채, 부자가 되는 것이 선이고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선전하는 거짓자본주의자들을 향한 분노와 심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의 하느님이고,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생명이 용솟음치고, 자비가 흘러 넘치는 마음을 가진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고른 비와 햇살을 비춰주시는 분이십니다(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한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시고, 참 빛을 보게 하며, 사랑을 음성을 듣게 하며, 진심어린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용납과 관용의 정신이 멍든 세계를 낫게하고,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사명입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경청을 할 수 있다면 우린 더 많은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무슨 사진일까요?>


<이건 무슨 사진일까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2. 15. 17:29
* 길어요. 굳이 읽으려 하지 마세요. 잘 다녀왔다고 써 본 거에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사성찬례 中, 축복의 도유 예식 


대한성공회 전국 성직자 신학연수 후기

 

주제 : 성령으로 하나 되는공동체 (소통으로 갈등 해소)

일시 : 2011년 2월 7일(월)~9일(수)

장소 : 성공회대학교 미가엘관

 

주제 강연은 조선일보 위클리비즈 편집장인 이지훈씨에 의해서 “소통을 통한 갈등 해소”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이지훈씨는 작년(2010년)에 “혼, 창, 통”이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지훈씨가 위클리비즈 편집장으로서 세계의 경영인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유명한 경영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름대로 “혼, 창, 통”이라는 프레임으로 살펴본 것이다. 요컨대, 지도자는 (영)혼이 있어야 하고, 창조적이어 하고, (소)통을 잘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금요일을 기다리고 있다며, 자신의 일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곳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것이 나오기 어렵다. 지도자는 이들에게 what이라 묻지 말고, why라 물으며 스스로 일에 대해 자발성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고 소명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은 금요일에 복권이 당첨돼도 다음 월요일에 다시 직장에 출근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급여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정말 재미를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통이란 결국 일치된 어떤 혼의 소통이다. 팀이 주어진 일에서 같은 혼을 느끼고 혼신을 다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지도자와 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고, 지도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지지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경청이 중요하다. ‘노래방에서 보면,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듣고 즐기기 보다는 다음에 자기가 부를 노래를 찾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경청이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 다음에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경청에는 ‘배우자경청<소극적경청<적극적경청<맥락적경청’이 있다. 맥락적 경청이란 상대방의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이 의도하는 바를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고, 진심을 말할 수 있도록 돕는 말이다. 이지훈씨는 마지막으로 성직자들이 삶과 유리된 설교를 한다며, 신자의 대부분이 직장인이라는 것을 알고 직장인을 위한 말씀을 해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조선일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주제강연을 듣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마도 많은 성직자들이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이지훈씨의 강연은 분명 흥미로왔다. 특히, 원주나눔의집은 지난 해 공동의 소명과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함께 했었는데, 이지훈씨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사람을 ‘자발성, 창의성, 의식성’을 가지고 삶을 변화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운동하는 주체로 본다. 재미있게도 이지훈씨의 분석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우스운 생각도 해 보았다. 극과 극은 통하는가? 이지훈씨는 전문 경영인을 인터뷰한 것이고 그 한계도 갖고 있다. 결국 이것의 목표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혼창통을 잘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라고 설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어떤 직업윤리의식을 주입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좋은 결과만을 ‘선’이라고 생각하며 쫓아가던 경영인들이 이제는 과정의 의미를 음미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종교가 한 사람의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 여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닮아가고 있다. 이지훈씨는 경영인들이 약육강식의 방식을 버리고, 적자생존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다. 강한 것이 되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간으로 최영실 교수님(성공회대 신학교수 / 신약학)께서 ‘성령으로 이루는 소통과 하나됨’에 대해서 강의하셨다. 특히, 고린토교인들에게 보내는 첫째편지(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서 고린토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로 사도가 어떻게 하라고 권고하였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고린토 지역은 그리스의 항구도시이다. 고린토 지역은 와일드하고, 급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도 열광적 신도들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서로를 용납하기 보다는 분파를 만들고 다투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그리스도인 간에 이견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로는 우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강자든 약자든, 인간 모두가 사실은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이고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사람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차별 없이, 거저 구원과 생명을 주셨다. 값없이, 나의 공로 없이 주어진 구원이기에 “복음”이며, 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령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못하게 만든다. 성령은 나의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이기에, 성령의 각종 은사는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할 수 없고 동등한 것이며, 성령의 은사는 자기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 누구도 종교적 교리나 신념,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인간을 죽이거나 심판해서도 안된다.

바울로는 스스로를 종의 신분으로 드러낸다. 거룩한 ‘주님의 종’이 아니라, ‘여러분의 종’이라고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1고린토 4:5) 바울로는 성령을 금식이나 금욕, 신적 제의나 신과의 합일을 통해 얻는 신비적인 체험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의 ‘복음’을 통해 주어 지는 것이며, 성령을 받은 자들은 결코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되며 모든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장벽을 깨뜨리고 다른 이들ㅇ르 섬기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혜로 거저, 용서와 사랑을 받았음을 일깨워, 조건 없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며 살리는 일로 나아가게 한다.

 

세부주제 1. 한국사회와 교회의 소통

손석춘 선생님의 “한국사회 갈등과 종교의 역할” 강의가 이어졌으나, 아쉽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듣지 못했다. 페이퍼를 통해 보면, 한국사회의 갈등은 언론이 제 역할인 갈등을 소통하게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오히려 갈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요점이었다. 종교는 이런 사회상황 속에서 바른 여론형성을 위한 소통의 다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세부주제 2. 신자와 성직자의 소통

다음 날, 첫토론은 신자와 성직자간의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자들의 대표격인 분들이 패널로 나와서 여러 가지를 주문을 했다. 정성을 다하여 전례를 드리고, 충분히 준비하여 설교를 해 달라는 점. 신자들과 성직자 간의 벽을 낮추어 달라는 점. 내가 지도자니가 모조건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기존의 사고를 바꾸어 달라는 점. 신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차별하지 말아 달라는 점.

 

세부주제 3. 관구와 교구, 교구와 교회 사이의 소통

성공회대학교 총장 양권석 신부님은 소통이라는 주제가 시대의 화두이지만, 소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숨겨진 목적에 의해서 소통이 지향하는 목적이 결정된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소통을 이야기할 때는 소통 자체의 기술적 방법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떤 소통을 할 것인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의 역사가 사실은 소통의 역사이고, 교회가 소통을 말하는 목적은 진리를 향한 식별과 수용과 실천에 있으며, 그것은 변화와 회심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한걸음씩 더 가깝게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성령의 인도를 벗어난 소통과 합의가 만들어낸 불행한 오류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소통 그 자체 보다는 무엇을 추구할지에 대한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교회는 종말론적 지향을 분명히 갖고 있기에 시대를 지배하는 삶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자면, 성령을 통한 식별과 수용과 실천의 효과적인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공회는 “성서, 이성, 전통”이라는 권위의 삼중구조를 갖고 있다. 성서주의나 전통주의에 얽매인 것일 수 없고, 나아가 이성이 말하는 시대정신의 포로가 되어서도 안된다.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소통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가가기 위한 개방적 소통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성공회의 전통적인 의사소통구조의 개념은 시노달리티(synodality, 함께 길을 걷는 것), 콜레지알리티(collegiality, 동반자적 상호컨설팅), 공의회성(conciliarity, 교회일치-차이와 함께하는 수용)이라고 소개하였다. 성공회는 자신을 이미 완성된 공동체로 보지 않고, 목표를 향해 걷는 개인과 공동체의 순례의 길에 동반자로서 여정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지게 하고, 더 많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창조적 재발견의 가능성으로 활용하자. 식별과 수용과 실천을 향한 synodality, collegiality, conciliarity의 중요성, 그리고 상호간의 지속적인 consulting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연습하자고 하였다.

 

교무국장인 김광준 신부님은 1) 교구의 자치권이 대한성공회라는 공동체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 ‘상호의존과 보완의 원리’를 찾는데 집중하여 달라고 주문하였다. 관구가 교구 간의 협의체 수준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위상을 가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2) 3개 교구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며, 교구 간에 유연한 성직자 인사교류와 재정 통합 내지는 나눔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3) 관구-교구-교회의 일치된 선교방향을 위해서, 공동선교지역(강원도, 전라도)의 교회개척과 교구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협력방법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춘천교회 이한오 신부님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사회이론(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행위로 분류)과 야스퍼스의 의사소통과 실존적 상호소통론(현존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상대와 끊임없는 성찰과 소통을 통해 본래적 자아를 찾는 실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철학)을 소개하였다. 의사소통 공동체로서 교회와 구성원들은 합리적 이사소통행위를 꾸준히 추구하고, 본래적 자아(실존)을 찾기 위해 소통하라는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소통상황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던진다. 의사소통 행위 속에 전략적 행위는 없는가? 의사소통은 추구하지만 실은 전략적 행위를 하는 자기기만적 행동은 없는가? 자기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비합리적 돌출행위를 하거나, 교회내 전략적 행위에 의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상처와 실망감 때문에 소통 자체를 포기하고자 한 적은 없는가? 이한호 신부님은 갈등을 배제하기 위한 소통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라고 하였다. 소통이란 갈등상황이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하며, 문제는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일반/세계성공회/대한성공회/교구/교회(기관) 각 단위별로 목표가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계성공회의 목표를 공유하면서 지역 단위들은 좀 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구는 개별교회의 ‘목표컨설팅’을 잘 해야 하고, 사제가 실존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개별 교회들은 교구 전체의 목표와 구분되는 목표, 즉 신자의 숫자로 목표를 삼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 목표를 가지고 교류와 교육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부주제 4. 주교-사제-사제 간의 소통

진천교회 강민용 신부님은 주로 주교와 사제간의 소통에 대해서 말했다.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정직하고, 투명하며, 시스템을 통한 행정적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며, 신자와 사제를 일치시키는 통합되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제와 주교는 서로 존중하며 돌보아주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주교와 사제의 불통은 이해 부족에서 오며, 공적인 자리에서 말은 신뢰를 담보해야 하며, 예측 가능해야 하며, 들은 사람들은 방향을 읽어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직한 목표설정, 경청과 희생이 낮은포복(?), 인내가 서로를 소통의 길에서 만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제주교회 박동신 신부님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한 신학자)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제시한 원리를 살피면서, ‘주교-사제’의 직접적인 만남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에 “예수님을 통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만남을 하기 전에 침묵과 기도로 예수님을 초청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후에 만남을 갖는다면, 소통이 장애물을 만나 위기를 맞아도 풀어갈 힘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참된 감사성찬례를 함께 나누고, 주교와 사제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하는 것이 소통의 통로가 된다고 하였다(이것은 사제가 자기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성장이 안되면서 무슨 말을 하겠냐는 말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주교, 교구의회, 상임위원회, 교무구, 사제단 등 여러 가지 행정조직과 의사결정구조를 잘 운영하여야 하며, 존중과 순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보면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 자발적으로 소유를 나누게 된 초대교회의 경우처럼, 물질적인 나눔이 실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울교구 김근상 주교님은 성직자 인사에 있어서 교구장의 솔직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사제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특히, 성직자들이 인사에 대한 불만을 ‘투덜거리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뒤에서 불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동체 내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대안을 내어오면 좋겠다고 하였다. 교회가 주교에게 준 책임과 권한에 대해서 설명하며, 주교는 사도적 교훈 및 공교적인 진리를 수호할 책임이 있으며, 교구를 대표하고 교구의 사목을 통할하며, 교구내 지역교회간의 일치의 상징이며, 치리의 권한도 있는 등 사제와는 분명히 ‘구별’된 권한과 권위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주교와 사제 간에 소통에 있어서, 권한과 권위의 차이가 있으나 균형잡힌 이해와 상호보완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강연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는 오성주 교수가 맡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한데, 사실 경청을 잘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심판자의 위치에서 질문하는 것은 제대로 답변을 들을 수 없고 경청도 아니라는 것이다. 심판자의 길은 모든 것을 옳고 그름, 위 아래, 성공 실패라는 이분법적 분리주의에 근거하여 심판 정죄하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 학습자의 질문은 이분법에 근거한 심판 정죄자의 칼을 내려 놓는다. ‘뭐가 잘못됐지? 누구 탓이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지?’와 같은 질문을 내려놓고,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뭘까? 내가 책임질 일은 뭘까? 내가 배울 점은 뭘까? 이 일에서 유익한 점은 뭘까?’와 같은 학습자의 질문이 자율성과 내면성과 관계성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미국 퀘이커 교도들(전례와 교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급진주의 교단)이 고안한 “신뢰써클(신뢰모임, 정화모임)”의 방식을 소개하였다. 개개인 모두에게 면에 내면 자신의 문제들을 접근하여 다루려 할 때 필요한 안내역할과 해결능력을 제공해 주는 내적교사 혹은 진실의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여러명이 함께 모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경청하며 문제해결을 할 수 있게하는 모임이다. 이 모임은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는데, 구성원들은 모임 이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을 지켜야 하고, 당사자가 대화요청을 하지 않는 한 이문제로 당사자와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이중비밀보호 원칙이다. 그리고 질문은 가르치거나 감정적 동감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냉정하면서도 정직하고 개방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그게 당신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있나요?” 같은 질문은 금지된다. “당신은 전에도 이와 같이 느낀 적이 있었습니까?”와 같은 식의 질문이 필요하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며, 한국적인 분위기는 공감해주고 격려해주는 식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직접 적용하기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2박3일 동안의 강연 내용을 모두 요약해 보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고하기 바란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나 강연은 강연이며 거기에서 어떤 실천이 도출되기는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앞으로 사목의 현장에서 강연의 내용들을 기억하고 접목하며 적용하는 과정이 이어지게 되리라 생각한다. 신학연수를 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기도로 도움을 주신 교회에 감사하며, 빈 자리를 채워 준 원주나눔의집에게 감사드린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춘천교회 이한오 신부님과 강연 후에 차를 마시며 간단하게 나눈 대화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춘천교회는 춘천나눔의집(박순진 신부님), 프란시스 수도회, 요한피정의집으로 구성된 춘천선교협의회를 진행중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어떤 목표를 정하지는 못하였고, 서로 친해지고 소통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밥을 먹고, 공부하고, 기도한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춘천교회와 함께 연합감사성찬례를 드리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긍정적이었고, 다만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두기 보다는 일단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먹고 하는 과정을 하자는 답을 받았다. 공동선교구역인 강원도에서 어떤 선교방향을 잡을 수 있을 지 기도하고, 소통하고, 밥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 나눌 계획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내는 은자 2011.02.16 11:23  Addr  Edit/Del  Reply

    신부님. 더 이상 잘 요약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마지막 강의 '경청'은 실천이 도출될 가능성이 있을 듯 해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1. 27. 13:13

사회복지시설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사유화에 있습니다.
사유화가 문제인 이유는 공공복지시설을 개인의 치부를 위한 사업장으로 변질 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바다학교 문제도 그랬습니다.
에바다학교는 경기도 평택에 위치해 있는 농아인학교입니다.
특수학교의 특성상 기숙사가 있었는데, 기숙사에 살고 있는 농아학생들이 학교를 상대로 데모를 한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학교 이사장과 식구들이 학교를 좌지우지 하는데, 기숙사 천정이 내려앉고, 화장실이 망가져있는데도 방치되어 있고, 미군들이 학교봉사차 찾아와서는 성희롱을 하는 등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고, 학생들이 없어지거나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도 발생했고, 이미 사망한 아이를 살아있는 것으로 해서 지원금을 받아내는 등 당시 티비에도 방영되고 유명했었습니다.

당시 신학생(장로교)이던 저는 군제대하고 PC통신 재미에 푹 빠져있던 시기입니다. 장애인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천리안 수화사랑동아리에 가입했고, 몇번 정모와 번개도 나가고 그랬더랬죠. 그러다 에바다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관심있는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해아래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분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나... 컴퓨터도 기증받고, PC통신도 가르쳐주고 그랬는데... 아무튼, 해아래집은 농성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나자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일부 선생님(권오일 선생님은 지금 정상화된 에바다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계신 것 같군요.)들이 학교 근처 냇가에 집을 마련하여 함께 살던 집입니다.

참 길었던 투쟁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국민과의 대화를 한다고 티비생중계할 때도 한 장애인과 봉사자가 에바다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했었습니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 때에도 해결되지 않아서 농아학생이 편지쓰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게 비리재단의 문제라는 데에 놀라웠었죠. 저야 간간히 개인으로 참가하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대학교 별로 하나씩은 있었던 수화동아리들이 참 고생 많이 했었습니다. 평택시청 앞에서 천막농성 한 기간만해도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역에 뿌리깊은 비리인사들과 관과의 유착을 끝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들은 또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들 계신지... 지금은 정상화 되었지만, 여전히 구재단측에서는 복귀를 위해서 틈을 노리고 있다는 후문도 있더군요.

경건한(?) 신학교 내에서 투쟁하는 현장에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것도 참 어려웠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으로 찾아가야 해서 조금 외로웠었죠. 하지만, 에바다투쟁은 저를 많이 변화시켜습니다. 장애인의 문제는 시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인 부분 뿐 아니라 사회적인 부분에서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근본주의 보수적인 신앙을 일신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준 기억들입니다.

나눔의집을 사회선교기관이라고 부르는데요. "사회선교"는 "개인전도, 개인구원"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전도가 한 개인의 영적인 변화를 위한 전교행위라면, 사회선교는 이 사회의 변화를 위한 예언자적 행동인 것입니다. 즉, 사회선교란 이 사회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의미를 "기독교 국가"라는 의미와 헛갈리면 안됩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지, 어느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교회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선교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연과 사람과 하늘이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며, 생명의 가치를 존엄하게 지키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에바다 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선교"의 장이었습니다.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을 평화와 정의와 생명이 숨쉬는 곳으로 바꾸어내는 것이 선교입니다. 나눔의집도 원주지역에서 사회선교의 선교적 과제를 고민하고 운동하는 곳이니 사회선교기관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사회'복지' 보다도 사회'선교'라는 개념은 더 운동성을 가진 개념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자 전통에 기반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어떻게 하느님을 예배드려야 하는지 묻습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읍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우리의 예배는 민중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 사회를 평화롭고 정의롭게 만드는 것, 세상권력자들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단 내지르고 보는 은자씨 2011.01.30 22:36  Addr  Edit/Del  Reply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 감사합니다. 사회선교, 하느님의 선하신 뜻,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 권오일 2011.01.31 10:51  Addr  Edit/Del  Reply

    안녕하십니까? 에바다학교 권오일입니다.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이신가요? 우리 에바다가 이렇게 정상화될 수 있었던 기적은 국신부님 같은 분들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에바다투쟁에 함께 해 주셨듯이 이제 전국에서 가장 투명하고 민주적인 학교로 거듭난 에바다학교를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시고 꼭 감시와 견제를 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며 해결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만 맡기고 감시와 견제를 하지 않으면 10년, 20년 뒤에는 저도 비리의 주범이 되어 퇴진의 대상이 되어 있지 않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어느 개인의 양심과 의지에만 맡겨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투쟁했던 정립회관 사태가 바로 그 증거일 겁니다. 정립회관은 장애인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정상화 하였고, 관장과 사무국장을 투쟁의 주체들이 추천하여 선임했던 것인데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비리의 주범이 되어 퇴진의 대상이 된 사건입니다.
    꼭 우리 에바다에 대한 사랑을 끊지 마시고, 감시와 견제의 역할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되시면 우리 에바다학교에 꼭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티백녹차는 진짜 맛있게 잘 탑니다.ㅎㅎ

    국신부님의 글을 우리 에바다학교 게시판으로 옮겨가려고 합니다. 괜찮겠지요?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에바다학교 권오일 올림

  3. 무미건조 국신부 2011.01.31 11:38  Addr  Edit/Del  Reply

    권오일 선생님께서 직접 블로그에 글을 남겨주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당시 대전신학대학 손짓사랑회 회장입니다. 지금은 성공회 신부가 되어 강원도 원주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에바다학교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감시와 견제는 제 몫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다만, 에바다학교 기념일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제 수첩에 기록하고 그 날에 에바다학교를 위해서 매해 기도하겠습니다.
    김형수, 좌동엽 씨... 등등 다들 궁금하네요.
    해아래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건가요?
    마을 버스에서 내려서 해아래집까지 걸어가던 시골길이 눈에 선합니다.
    못하는 수화였지만, 그래도 농아인하고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하하~

    저도 오늘 하루하루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찾아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설명절 잘 보내시고, 학교와 선생님들, 그리고 해아래집 식구들, 농아원 식구들 모두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평화~

  4. 까칠민정 2011.02.01 12:14  Addr  Edit/Del  Reply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서울교구 나눔의집 5주년 기념 비디오에서 보고 마음 속에 간직했던 말이예요. 가슴이 뭉클해지고 따뜻해지는 그 말. 우리 나눔의집도 그 일에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