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 3. 3. 16:51

삼일절이 지났습니다. 일제에 맞서서 한반도의 민중이 일으킨 비폭력 저항운동이 삼일만세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폭력 운동을 성서의 산상수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비폭력 저항의 방식이라 이해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기독교인들은 칼을 들고 저항하기 보다는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이 순교의 씨앗이 기독교를 반석위에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의 진리가 불의한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고 참 평화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혹시 알게 모르게 교회가 국가권력과 야합하여 권력의 편을 들어줌으로 해서 순교가 멈추었던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불의한 국가권력 등에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로 설교되어 왔습니다.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친권력주의적 성향을 꼬집으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폭로하였습니다.

한편, 신학자들 중에서 이 말씀을 "무저항"을 강제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비폭력적인 방식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규항'씨는 그의 책 "예수전"에서 오른뺨을 치는 것은 오른손의 등으로 때린 것, 즉 상대방에 대한 심한 모욕을 의미하며,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상대에게 나도 인격체이니 제대로 때리라는 조용한 외침이라고 해석하였다. '월터 윙크'는 그의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벗어주고, 5리를 더 걸어주는 행동은 상대방에게 당혹감을 주는 적극적 비폭력의 방식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겉옷까지 벗어주고 나체로 자신을 드러내어 상대방이 '제발 겉옷은 입어주시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7-8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탄압에 맞서서 나체로 시위를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억압자'에게 저항하는 '비폭력 피해자'의 구도는 변함이 없다. 다만 피해자의 행위가 무저항에서 비폭력저항으로 바뀌어 설명되어질 뿐이다.

국내 신학자 중에서 성공회대학교 최영실 교수는 이러한 구도를 완전히 역전시킨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행해질 때 폭력을 당하는 사람도 상대를 향해 원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폭력을 하는 사람도 폭력의 정당성을 상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보복금지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본문(마태 5:38-48)은 "형제에게 화를 내고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1~26)"는 본문과의 연관성을 속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형제들을 원수로 규정하여 보복하려는 것을 멈추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형제를 원수로 지목하고(폭력의 정당성 획득), 보복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멈추라는 말씀이라는 해석은 해방적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제자그룹과 일반민중들, 그리고 바리사이파와 군인들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 행해졌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이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드러내신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오른뺨을 치는 사람도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가 아니라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해자는 상대가 '원수, 맞아도 싼 놈, 죽일 놈'으로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아무런 도덕적 거리낌 없이 일상적인 폭력을 행하는 자였다. 어느 날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리던 상대가 저항의 몸짓을 취하였다. '너도 한 번 맞아봐라. 왜 때리는 거냐.'하며 오른뺨을 때린 것이다. 가해자는 그 순간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서 당연시 해왔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도끼는 도끼가 부러졌을 때 도끼로서의 존재가 더 확실해진다. 피해자이기만 했던 존재가 죽을 각오로 저항할 때, 비로소 그 존재에 대한 개념규정이 새롭게 리셋되는 시점이다. 이런 저항을 '적극적 평화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의 싸다귀'라고 불러도 좋다. 폭력 앞에서 '회피, 순응, 역폭력'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제4의 대안적이며 창조적인 길(왼뺨을 돌리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고민해야 할 사람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날 해방의 싸다귀를 얻어맞은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삼일운동도 불의한 일제에 맞선 적극적인 평화운동이며,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쓰러뜨린 것 또한 적극적인 평화운동이다. 비폭력인가 아닌가가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 가해자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평화운동의 방식과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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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내는 은자 2011.03.03 22:50  Addr  Edit/Del  Reply

    '해방의 싸다귀' 정말 놀라웁네요... 정말요... 진정어림과 냉정함이 있는 사랑과 바로 연결이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2. 무미건조 2011.03.10 09:31  Addr  Edit/Del  Reply

    건강추구? 저런...

  3. 성공회원주나눔의집 2011.03.11 11:10 신고  Addr  Edit/Del  Reply

    댓글을 삭제하였습니다..ㅋㅋㅋ